힘들고 슬픈 감정만 골라서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석하게도 그건 불가능하다. 그럴 수도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 모든 감정은 다 저마다의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럴만하니까 슬프고 화가 나는 것이다. 세상에 나쁜 감정은 없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감정에 압도되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살기 위해서 힘든 감정들을 무시하게 된다. 얼마나 괜찮아지고 싶었으면, 전혀 괜찮지 않은데도 괜찮은 척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뜻하지 않게 좋은 감정까지도 억누르게 되고 결국 어떠한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게 된다.

이렇게 내가 감당해야 할 감정의 가짓수와 크기를 줄여 나가면 당장은 삶이 굉장히 편해진다. 요동치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아도 되고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인생은 어차피 그렇고 그런 거라며 웬만한 일에는 호들갑 떨지 않게 되니 에너지도 아끼고 얼마나 좋은가.

이런 장점에 비하면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부작용쯤은 별것 아니다. 인생은 원래 고통스러운 건데 뭘 그렇게 호들갑들인지. 나처럼 그냥 받아들이고 살면 되는 것을. 또 뭐가 그리 즐겁다고 신나서 난리인지. 그저 적당히 좋아하는 척하고 말면 되는 것을. 어차피 인생은 혼자인데, 남의 감정 따위 내가 신경 쓸 필요 없지 않을까. 아무도 내 마음에 관심 없었으니까. 내가 얼마나 힘들고 비참했는지 아무도 몰라줬으니까.

그렇게 나는 점점 지워진다. 빛바랜 컬러 사진에서 흑백 사진으로, 점점 더 흐려지다 형체도 분간하기 힘든 그 무엇이 된다. 그저 시간에 부유하듯 흘러가기만 하는 존재가 된다. 단 한 번도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하고 채워지지 못한 채 흐물흐물한 어떤 것이 된다. 무가치한 것이 된다.

나는 나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조건부로 가치 있는 존재. 말 잘 듣고 사고 치지 않고 뭐든 잘 해야 가치 있는 존재였다. 내 행복의 기준은 나에게 없었다. 죄다 타인에게 있었다. 남이 좋아하면 옳은 일이고 멋진 일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기분에 맞춰가며 칭찬과 인정을 갈구하며 살았다. 착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나는 또다시(이미 한 번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버림받을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착하고 예의 바르고 도덕적인 사람인데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무례한 사람뿐일까. 왜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을까. 유독 활발하고 나대는 사람을 보거나 조금만 껄렁한 사람을 봐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남들 앞에 나가서 당당하게 자기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역겨웠다. 뭐가 그리 잘났다고 나서는 건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저건 아무것도 아니지. 정작 마음먹는 대신 맥주를 연거푸 들이키며 시뻘게진 눈으로 그들을 노려봤다. 나는 적어도 착하게는 산다고! 부도덕한 주제에 굉장히 올바른 척하며 사는 것에 익숙해진 내 속은 고름으로 가득찼다.



나와 타인의 감정에 무감각한 사람. 다른 사람의 인정으로만 살 수 있는 사람. 누구보다도 그들을 부러워하면서 증오하는 사람. 알량한 도덕적 우위로 자위하며 사는 사람. 마음먹는 대신 술을 먹는 사람. 어떻게든 하지 않을 이유만 찾는 사람. 모두 나였다. 나는 또 다른 나인 그들을 외면했다.

대신 나는 가면 놀이에 심취했다. 고양이 수의사라는 페르소나.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이라는 가면이 내 전부인 것처럼 굴었다. 정작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볼 줄도 모르고 내 감정을 상대에게 덮어 씌우기만 했던 나에게 그 가면은 버거웠다. 내가 베푼다고 착각했던 친절은 일방적인 훈계에 지나지 않았고, 돌아오는 상대방의 무표정만으로도 나는 무너졌다.

그렇게 내 그림자들을 무시했던 나는 더 어두운 늪으로 빠졌다. 정작 중요한 일은 팽개치고 다른 일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했다. 돌아오는 싸늘한 반응에 또 분노하고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고 정신을 놓고 또 분노했다. 엉망인 나를 합리화하며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다. 내가 버리고 방치했던 나의 그림자들은 나를 용서하지 않았다.

나를 받아들여줘. 나도 좀 좋아해 줘. 날 인정해 줘.

내가 세상을 향해 속으로 외치고 있던 말들은 내 그림자의 것이었다. 내가 돌보지 않은 그들이 지르는 소리였다. 나의 비명이었다. 그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들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나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제서야 나에게 눈길을 돌린다.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고름을 닦아내고 안아준다. 옆에 있어준다.

화가 났구나, 슬펐구나 끄덕여준다. 그것도 못하냐 병신 같은 놈아 같은 소리는 이제 하지 않는다. 잘했어. 수고했어. 기특해. 토닥여준다. 우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봐 준다. 최대한 옆에 있어주려고 한다. 그동안 혼자였던 내 옆에 머물러 주려고 한다.

상대의 마음을 습관적으로 읽는 대신 헤아려 보려고 한다. 내 감정을 상대에게 던지지 않으려고 한다. 잠깐의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으려고 노력한다. 상대가 다른 의견을 내도 내 존재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되뇐다.

이 모든 일이 아직은 어렵다. 흐물흐물한 무형의 존재로 살아온 것이 40년이라 쉽지 않다. 하지만 결국엔 내가 나의 모양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다. 여전히 추하고 엉망이더라도 내가 다 받아줄 테니까. 내가 옆에 있어줄 테니까. 너는 적어도 나에게는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안아줄 거니까.

*이 글은 저의 브런치(https://brunch.co.kr/@23729d1d9b0245c)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