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의 경험이 고양이에게 미치는 영향

누구나 어린 시절의 상처를 하나쯤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굉장히 심각한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상처가 크건 작건 그것을 잘 해소하거나 극복한 사람은 온전히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누군가는 평생을 과거에 발목 잡힌 채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남들 앞에서 불안하지?
나는 왜 남들한테 싫은 소리를 잘 못할까?
나는 왜 내 스스로를 괴롭히는 행동을 많이 할까?
왜 나는 나를 비난하는 말을 자꾸 하는 걸까?

그냥 내 성격이 이래서 그래, 내가 지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래, 나는 자신감이 없어서 그래.

하지만 실은 온전히 치유하지 못한 어린 시절의 내 감정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내가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대상, 즉 주 양육자인 부모가 알아주고 달래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거나 오히려 그 상처가 부모로부터 왔다면 어떨까요?

어린 내가 겪었던 두려움, 불안, 슬픔, 우울함 같은 감정들이 고스란히 우리의 마음 바구니에 담긴 채로 남아 있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더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어린 시절 어느 정도의 좌절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한 좌절의 허들을 잘 넘어본 경험을 한 사람만이 인생이라는 여정을 잘 헤쳐나갈 수 있고 성취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좌절이라는 잡초를 부모가 죄다 대신 뽑아준 사람은 스스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크기가 너무 컸거나 너무 오래 지속되었거나 거기서 받은 부정적인 감정을 위로받고 치유하지 못했다면 내 노력과 무관한 힘듦이 우리의 인생에 밑그림처럼 깔리게 됩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익숙해지게 되죠. 묘하게 기분 나쁜 그늘이 진 담벼락, 그것이 나의 기본값이 된 채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아무리 예쁜색을 덧칠해도 예뻐지지 않아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고양이가 얼굴에 그늘이 진 채 쳐다보고 있다


그들도 그렇다

고양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미의 뱃속에서부터 신생아기, 유아기를 어떻게 보냈는지가 꽤 중요합니다. 유전적인 요소와 타고난 기질을 무시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고양이들이 어린 시절 어떤 경험을 했는가가 고양이의 평생에 걸쳐 영향을 줍니다. 고양이가 세상에 나온 지 2-9주 사이(사회화 시기)에 사람이나 다른 고양이와 좋은 경험을 했다면 그 고양이는 나중에도 그들과 무난하게 잘 지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대부분 2개월 넘은 고양이를 데려오기 때문에 사회화 시기를 놓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생후 36개월 이전까지의 ‘사회적 성숙기’도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화 시기가 지났더라도 어려서부터 지속적으로 보호자와 좋은 경험을 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분히 해소할 수 있는 환경에서 지낸다면 스트레스를 잘 견딜 수 있는 고양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들은 성묘가 되기 전까지 대부분 에너지가 넘쳐서 사람을 자주 깨물기도 하고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요. 그런데 우리가 그 시기를 잘 참으며 기다려주지 못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고양이를 심하게 혼내고 자꾸 주의를 주고 고양이의 행동을 잘못된 방법으로 통제하려 한다면 고양이의 문제 행동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더 예민하고 스트레스에 취약한 고양이로 자라게 되는거죠. 그렇게 된다면 고양이는 좌절을 쉽게 경험하고 정신적인 질환을 겪게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수많은 고양이들을 진료해오면서 느낀 것은 사람만큼이나 고양이들의 성격과 기질도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수줍음 많은 고양이, 자신만만한 고양이, 예민한 고양이, 둥글둥글 사교적인 고양이. 이렇게 각기 다른 고양이들이 또 그만큼 다양한 성격과 기질을 가진 보호자들과 지내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똑같은 기질과 성격을 가진 고양이라도 시간이 갈수록 꽤나 다른 성향의 고양이가 되어 있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만지는 것에 예민했던 고양이가 그래도 어느 정도의 핸들링을 견뎌주는 것을 보고 감탄하기도 하고 겁이 많아 움직이지도 않고 조용히 병원을 다녀가던 고양이가 호냥이가 되어 나타나 놀라기도 합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문제 행동을 집에서도 보이는 고양이들도 꽤 있었고요.

고양이의 행동이 달라지는 것에는 환경적인 요소, 동거 동물과의 경험, 병원에서의 나쁜 기억, 보호자와의 상호 작용 등 생각보다 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줍니다. 특히 고양이들이 병원에서만 예민해지는 것은 저를 비롯한 수의사들의 책임도 꽤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고양이가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고양이가 지내는 환경, 그리고 보호자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가 꽤 큰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집사가 되려면

저는 행동학 진료에 관심이 많아 문제 행동 상담을 할 일이 많습니다. 고양이의 행동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보호자님들과 상담할 때 제일 중요한 점을 꼽자면 ‘보호자에게 죄책감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몇 년 전의 저는 그것을 잘 몰랐고 보호자님에게 잘못이 있다는 방향으로 상담을 드렸던 적도 있어서 많은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의 취지도 ‘보호자인 당신이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 ‘사람 때문에 고양이에게 문제가 생겼다’라는 무거운 마음을 심어드리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다만 그들이 문제 행동을 보이고 있을 때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번만 해보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못된 고양이’라서가 아니고요.

어떤 고양이는 몸이 아파서 그럴 수도 있고요.
어떤 고양이는 너무 두려워서일 수도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일 수도 있죠.

그런데 어떤 고양이들은 단지 어렸을 때부터 학습해 온 대로 행동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람을 물고,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울고, 이물을 뜯어 먹고 토하고, 화장실 밖에 대소변을 보고.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 줬거든요. 사람이 살면서 당연히 할 수밖에 없는 반응과 행동을 했을 뿐인데 고양이의 행동은 더욱 강화가 되어버렸습니다. 정말 억울하죠. 근데 저도 저희 고양이에게 그랬었어요. 행동학 공부를 제대로 하기 전까지는 수의사인 저도 잘 몰랐으니까요.

고양이가 밤에 울면 나가서 일일이 반응해 주고
고양이가 싫다는 신호를 보내는데도 궁디 팡팡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손을 물면 “안 돼!” 하고 주의를 주기도 했습니다.

이제 11살이 넘어버린 제 고양이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제가 참 못된 집사였다는 것을 느끼거든요. 그래서 제가 더 고양이 행동학 공부에 파고드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처럼 후회하는 보호자님들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행동학 공부를 하다 보면 크게 상처받은 제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불안, 좌절, 두려움, 갈등, 공격성 이런 단어를 보면서 저의 마음 바구니에 담겨 있는 여러 감정을 들여다보는 기분도 들고요. 그렇게 단어들을 하나하나 곱씹는 것으로 내가 이 감정들을 놓아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하고 기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결론은,
저희 집 고양이를 비롯한 모든 고양이들이 더 편안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속마음을 알 수 없는 고양이들과 사는 보호자님들의 마음도 덩달아 평온해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