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고양이 수의사가 되었을까

나는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문득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길을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신 차려보니 ‘고양이만 진료하는 수의사’가 되어 있었을 뿐.

저는 원래부터 수의사가 꿈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수의사라는 게 한 번쯤 꿈꿔봐도 좋을 직업이구나 생각은 들지만 적어도 입시를 준비하던 저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입학했던 2003년도는 수의사 그리고 수의대의 인기가 막 떠오르던 시기이긴 했지만 저는 소위 ‘의대병’에 걸려있는 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 꿈이 의사였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 의사가 되고 싶어졌고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지만 그게 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른 누군가의 바람이었을 수도 있고 그 시기에 성적 좀 나온다는 이과생들은 모두 의대, 치대, 한의대를 가려고 했기 때문에 덩달아 가졌던 목표였을지도 모릅니다. 드라마 때문일 수도 있고요.

수능날 주종목인 언어 영역을 망쳤고(이과생인데 언어 영역을 제일 잘했다는 아이러니) 저는 점수에 맞춰 수의대에 입학했습니다. 그러고는 어찌어찌 학교를 졸업하고 국가 고시에 합격해 수의사가 되었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딱히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었던 저는 공중 방역 수의사로 복무하는 동안 뭔가 해결되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이었고 거기서 1년 선배인 김명철 선생님을 만나 친하게 지내며 열심히 소랑 사슴을 검사하러 다녔습니다. 갤로퍼를 타고 시골길을 누비던 그때가 새록새록 하네요.

1년 먼저 전역한 김명철 선생님의 권유로 고양이 진료에 관심을 갖게 됐지만 그것도 하나의 선택지일 뿐 별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구르자 하는 마음으로 1년 차를 빡센 종합 병원에 들어가서 일을 배웠고 2년 차에는 김명철 선생님을 비롯한 세 분의 원장님이 계신 고양이로 유명한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저보다 높은 연차의 선생님들이 차례차례 퇴사를 하고 원장님 세 분과 저만 남은 상태에서 저는 얼굴이 시꺼메지도록 일을 했고 강제로 렙업을 당했습니다. 그 이후로 진료 팀장이 되고 부원장을 달게 되었는데 원장 제의를 거절하고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소심하고 걱정이 많은 저였지만 왠지 내 병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사람이 많은 곳을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제 평상시 심박수는 100을 넘었고 부정맥도 있었거든요. 퇴사 날 이후 시작된 어지럼증은 아직도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물론 원장님들께서는 저에게 매우 잘 해 주셨으니 오해 마시길.)


고양이 병원을 왜 해?

퇴사를 하고 병원 자리를 보러 다닐 때만 해도 강아지를 함께 보는 병원을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당시에 고양이만 보는 병원은 제가 근무했던 병원 단 한 곳뿐이었거든요. 주위에서도 모두 말렸습니다. 미쳤냐 그걸 왜 하냐. 게다가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사고까지 당해서 1년을 더 쉬게 되었고 자신감과 자존감 모두 바닥을 치게 되었습니다.

고양이 진료에 대해서 갖고 있던 자부심마저 희미해지고 있었죠. 그래도 마냥 놀 수 없어 대진을 다니고 강의를 다니기도 했지만 제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만 커져 갔습니다. 에이 그냥 개랑 고양이 다 보는 병원을 하고 고양이를 좀 잘 본다고 소문이 나길 기대해 보자. 그렇게 제 특기를 버리려고 했을 때 김명철 선생님, (그냥 제가 부르는 명칭으로 쓸게요.) 명철이 형이 그러더라고요. 너 고양이 병원 꼭 하라고요. 꼭 잘 될 테니까 해보라고요. 그때 그렇게 용기를 얻지 못했다면 저는 이 길을 계속 가지 못했을 겁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로 바빠 자주 만나지는 못하는데 직접 만나서는 입이 잘 안 떨어지네요 하핫.
(저희 병원의 ‘캣앤캣’이라는 이름도 김명철 선생님께서 주신 아이디어였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이 없네요.)

그렇게 저는 고양이만 진료하는 1인 병원을 (아마도 거의 2번째로) 개원하게 되었고 고양이 수의사로 살게 되었습니다.


고양이 수의사로 살기

처음엔 매우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현실과 이상은 달랐고 제 능력도 생각보다 충분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힘 조절을 할 줄 몰라 모든 진료에 불필요한 정보를 쏟아내고 보호자님과 고양이들 저마다의 상황은 무시한 채 입바른 얘기만 하기 바빴습니다. 어찌 보면 친절을 가장한 폭력적인 진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고서는 왜 이걸 알아주지 않지? 왜 이렇게 하지 않지? 혼자서 스트레스받기도 하고요. 정작 집사로서의 저의 삶은 그렇게 모범적이지도 않았으면서요.

어느 순간부터는 출근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냥 고양이를 많이 키우고 말지 고양이 수의사를 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입 밖으로 꺼내기도 했지요. 어떤 진료들은 빨리 지나가기만 바라기도 했습니다. 힘들게 병원에 데려왔을 보호자님과 고양이에 대한 공감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환자들의 지각에 민감했고 노쇼에 분노하고 보호자님들의 반론이나 지나친 물음에 스트레스를 크게 받기도 했습니다. 고양이들을 상대하는 것도 힘이 많이 들었고요. 긴장이 되고 불안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니 매일매일 녹초가 돼서 퇴근할 수밖에 없었죠.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갈수록 저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고 저 스스로 저를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상담을 받게 되었고 제가 왜 이렇게 힘든지 왜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스스로가 나를 부정하지 않고 어렸을 때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는 다름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아직도 저와 친해지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에요.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저 자신에게 더 솔직해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제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가면을 떼어내려는 과정이라고나 할까요?

이제는 조금이나마 병원에 오시는 보호자님들과 고양이들에게 진심으로 공감을 하고 현실적으로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일지 고민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모든 진료가 예전만큼 힘이 들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속으로 부글부글 끓던 화도 거의 없어졌고요. 혹시 화가 느껴지더라도 내가 그 걸 알아주니 곪아 터질 일이 없더라고요.

이제는 고양이 진료가 정말 좋습니다. 진심으로요. 예쁜 고양이들을 매일 만나고 저를 찾아와 주시는 보호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양이 행동학을 좋아하는 이유

고양이 위주의 진료를 해왔지만 처음부터 고양이를 잘 알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양이 질병’은 알았지만 ‘고양이’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는 없었죠. 개원을 준비하면서 고양이 행동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병원 인테리어나 진료 방식에도 하나씩 접목해 볼 수 있었습니다.

고양이 행동학을 공부할수록 사람의 심리학과도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양이 문제 행동의 기저에는 대부분 두려움과 불안이 깔려 있는데 그것을 대하는 방식을 공부하는 것이 꼭 저를 치유해 주는 것 같기도 해서 좋더라고요. 고양이의 질병만 보느라 놓쳤던 고양이의 감정과 스트레스에 대해서도 들여다 보게 되었습니다. 고양이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면 고양이들을 매일 접하는 보호자님들 마음의 힘듦도 덜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러려면 고양이 행동학을 공부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뇌를 가지고 있는 포유류들은 어느 정도 비슷한 뇌 신경학적인 기전을 공유합니다.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고 그것이 공격성이나 만성적인 스트레스로 이어지는 과정들이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 벽을 치고 숨어 있으면서도 관심과 인정을 바라고 그것이 잘 되지 않아 항상 화가 나 있었던 저로서는 고양이의 행동을 공부하는 것이 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고양이를 때리고 학대하는 사람들이 저를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화가 나기도 했고요.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고 연민의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그러한 행동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요.

결국 세상의 모든 사람은 무관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고리는 비단 사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갑니다. 상대가 사람이든 고양이든 내가 우월하다는 마음이 진정한 공감과 이해를 막고 관계를 해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나와 다른 존재를 내 의지대로 통제하려는 마음 역시 나를 돌보지 않음에서 온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국내에도 행동의학 전문의 제도가 생긴다면 꼭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때까지는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고 많은 사례를 접하고 도움을 주는 경험을 많이 쌓아가야겠죠. 더 많은 고양이, 그리고 같이 사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할 수 있겠죠?

그럼 저의 가면을 벗는 여정의 시작과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 말씀을 드리며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또 다른 솔직한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